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산 왕조 (문단 편집) === 지휘 계통과 편제 === 기본적으로 군의 통수권은 "이란 총사령관"인 '''에란 스파보드'''(Eran Spahbod)가 가지고 그 휘하의 장군인 '''스파보드'''(Spahbod)들을 지휘했으며, 군정 및 평화 협상을 포함해 전쟁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황제가 대귀족 중 한 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총사령관 대신 황제가 직접 나서 전쟁을 지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던 것이 [[호스로 1세]] 시대의 군제개혁 결과 총사령관직은 없어지고, 대신 제국을 4분하여 각 영역을 담당하는 지방 사령관직을 신설했다. 이는 각각 남동/남(Nemroz), 북동/동(Xwarasan), 남서/서(Xwarwaran), 북서/북(Adurbadagan)으로 나뉜다.[* 북방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불길한 방위이기 때문에 방위명이 아니라 지명인 아두르바다간을 썼다.] 일반적으로 귀족(Vuzurgan, Azadan)이나 분봉왕들의 영지를 제외한 지역들은 중앙정부의 관리가 행정을 맡았지만, 일부 변경 지역에는 군사/행정의 전권을 위임받아 사실상 분봉왕과 다름없는 권한을 가진 총독들을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를 '''마르즈반'''(Marzban)이라고 했다. [[아르메니아]]가 대표적인 지역으로, 상황에 따라 페르시아인 마르즈반들과 아르메니아인 분봉왕들이 번갈아 가며 통치했다. 제국 동부 지역에 임명되는 '''카나란'''(Kanarang)이라는 직책도 있었는데, 특정 지역에 임명된다는 것을 빼면 마르즈반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사산 왕조 군대의 정확한 편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파흘라비어 단어 중에 상/하위 부대에 관한 용어[* Washt가 모여서 Drafsh가 되고, Drafsh가 모여서 Gund가 되는 식]나 천인대장(Hazarmard) 같은 용어들이 있는 것을 볼 때 '''10진법에 따른 부대 편제'''를 갖추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도 10진법에 따른 부대 편제를 사용했으므로 그것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사산 왕조 말기를 다룬 기록에서 '''황제의 군단'''(Gund-i Shahanshah)이나 '''황금 창병대''' 같은 부대 이름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워낙 단편적인 기록들이라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사산 왕조 군대가 과연 중앙집권화된 상비군을 갖추었는가도 어려운 문제이다. 아르다시르 1세가 제국을 건설하면서 "상비군을 창설"했다는 설명이 있지만, 반대로 5~6세기 기록에는 "페르시아에는 동로마와 같은 상비군은 전혀 없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군대의 주력이 중장기병이었고, 이들은 양성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대부분 봉건 귀족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들은 전쟁시 샤한샤를 위해 싸우는 대신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지배/세습할 수 있는 독자적 영지를 갖추고 있는 봉건 계급이었다. 사산 왕조가 파르티아 시대에 비해 훨씬 강력한 중앙정부와 관료체제를 갖추고 있긴 했지만, 군사력의 주축이 소수의 봉건귀족 기병이라는 한계는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역할 역시 주요 대귀족들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서돌궐]]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장군 [[바흐람 추빈]]은 호라산의 파르티아계 대귀족인 메흐란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상비군 비슷한 것이 아예 없었다고도 보기 어렵다. 사산 제국 시대에는 로마와의 국경이 이미 수백년 동안 고착되어 강력한 요새 도시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전쟁 시 공성과 수성이 매우 중요해졌다. 따라서 요새를 지키려면 상당한 규모의 수비대가 있어야 하는데, 소수의 봉건 귀족들이 그 같은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또 사산제국은 파르티아에 비해 로마를 상대로 훨씬 공세적이었고[* 물론 나중에는 로마의 반격으로 오히려 역공당해 페르시아의 피해가 심각해져서 더이상의 공세를 못하고 화친을 맺는다.], 수년 이상 걸리는 전쟁도 소화해 낼 수 있었으므로 어쨌든 파르티아에 비해서는 훨씬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편 근위대 비슷한 것으로 '''자예단'''(Zhayedan 혹은 Zhavedan)이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이 낮으며 정식 기록에 따르면 사산 왕조의 근위대는 '''푸쉬티그반'''이나 '''기안 아비스파르'''로 대표되는 1,000명의 중장 기병대였다([[불사 부대]] 문서 참조). 대체적으로 봉건 귀족이 군사력의 주축이었던 것이 기존의 추세라면,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 시대의 개혁으로 인해 그 추세에 변화가 일게 되었다. 앞서 누차 설명한 대로, 이 시대 개혁의 목표는 중앙집권의 강화였다. 군 지휘체계에서 단일 총사령관직을 없애고 4곳의 지방 사령관직으로 나눈 것 역시 황제 이외의 인물에 지나치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호스로 1세가 군사 부문의 개혁에서 역점을 둔 것은 독자 영지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무장하는 군사력을 황실과 관료제가 봉급과 장비를 통제할 수 있는 상비군 성격의 군사력으로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개혁을 통해 육성한 데흐건 계급이 행정적 측면에서는 황실의 지방 통제의 최말단이 되고, 군사적으로는 중앙정부 직속 군사력의 중핵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 목표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달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분석하는 바가 다르지만, 최소한 개혁 이전에 비해서 군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